대부분의 유적은 눈으로 봅니다. 엘 젬은 발로 걷습니다. 아프리카 최대급 로마 원형경기장 앞에서 정작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사진 속 외벽이 아니라, 아레나 한복판에 섰을 때 사방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한 관중석의 압박감입니다. 이 체험은 그 감각을 순서대로 밟아 봅니다.

1. 아치 아래를 지나 아레나로
입구를 지나 어두운 아치 통로를 빠져나오면,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타원형의 아레나가 눈앞에 펼쳐집니다. 긴 지름 약 148미터, 짧은 지름 약 122미터. 발밑은 다져진 흙과 돌, 머리 위로는 세 층으로 쌓인 아치가 둥글게 하늘을 감쌉니다. 여기가 이천 년 가까이 서 있는 자리라는 사실이 한 박자 늦게 실감으로 밀려옵니다.
가장 먼저 할 일은 걸음을 멈추고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는 것입니다. 약 3만 5천 명을 수용했다고 전해지는 관중석이 사방에서 아레나 한 점을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. 검투사가 이 자리에 섰을 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을지, 몸의 방향만 바꿔도 상상이 달라집니다.
2. 발밑의 어둠 — 지하 통로로 내려가기
아레나 중앙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습니다. 이 원형경기장의 진짜 심장은 여기, 관중석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지하에 있습니다.
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아레나 바닥 아래로 두 줄기의 긴 통로가 뻗어 있습니다. 이곳은 맹수와 검투사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대기하던 공간이었습니다. 우리 안의 짐승, 도르래로 끌어 올리던 장치, 좁은 벽 사이로 스며드는 빛 — 머리 위에서 함성이 쏟아지던 순간, 이 어둠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이들의 긴장을 벽의 서늘함으로 느껴 봅니다.
보지 않고 돌아서는 사람이 적지 않은 곳이지만, 엘 젬에서 상상력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자리는 아마 이 지하 통로입니다.
3. 다시 위로 — 관중석 맨 위층까지
지하에서 올라오면 이번에는 반대 방향, 관중석의 계단을 따라 위로 향합니다. 세 층 가운데 오를 수 있는 구간을 따라 올라갈수록 아레나는 점점 작아지고, 반대로 시야는 넓어집니다.
맨 위 가까이에 이르면 원형경기장의 담장 너머로 엘 젬 시가지와 그 바깥 올리브 평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. 인구 2만 명 남짓한 작은 도시 한가운데에 이런 규모의 건조물이 왜, 어떻게 세워졌는지 — 이 전망 한 장이 그 물음을 대신 설명해 줍니다. 실은 끝내 완공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까지 떠올리면, 미완의 웅장함이 더 묵직하게 다가옵니다.

내려가고 올라가는 순서가 핵심
같은 유적이라도 아레나 → 지하 → 관중석 순으로 몸을 움직이면, 검투사의 시선(무대) → 대기하던 자의 시선(지하) → 관중의 시선(위층)으로 시점이 자연스럽게 바뀝니다. 하나의 건물을 세 사람의 눈으로 걷는 셈입니다.

